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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립대에서의 캠퍼스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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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평화교회
  • 작성일 : 18-05-10 16:15
  • 조회 : 5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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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하이오 주립대에서의 캠퍼스 목회  

 

김 현 덕
평화교회(예성) 최종인 목사 부인

사모로 17년 섬기면서 목회내조를 잘하지도 못하고, 내놓을 만한 간증도 없지만 저희에게 주신 하나님 은혜 가운데 5년여 유학생활을 보내었던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의 캠퍼스 목회사역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1996년 2월 9일 금요일

공군군목을 제대한 후 서울의 사당동에서 빈민선교를 하자며 개척하였던 10년을 보낸 후 이젠 어느 정도 교회도, 생활도 안정되었다고 느낄 즈음 남편은 갑자기 유학을 제의해 왔습니다. 이제 불과 5년이 지나면 2000년 새로운 21세기가 시작되는데 이렇게 앉아서 맞이할 수 없다면서 준비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 이미 남편의 나이가 40이 되었기에 유학비자가 나올 수 없다는 주변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더니 세 가족의 유학비자가 나왔습니다. 눈물과 땀으로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고 유학 길로 오를 때 많은 눈물이 났었습니다만 곧바로 새로운 지역에서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처음엔 캔자스주 위치타에서 생활하다 박사과정에 입학되어 비행기를 제일 먼저 만든 라이트 형제의 고향인 오하이오주 데이튼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남편은 이곳의 감리교연합신학교(United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공부에 바쁘다고 주일날 미국교회에서 한 번, 한인교회에서 한 번 예배에 만족하는 편안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미국에 왔지만 이렇게 신앙생활해서는 안되겠다 자각하고 있을 즈음 강신욱 목사라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20여 년 전에 유학 와서 어렵게 공부해서 신학교를 마치고는 40세에 다시금 의과대학에 들어가 의사가 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병원에서 진료하시면서도 선교의 열정을 버리지 못해 당신 가족과 우리 가족이 함께 토요일과 주일에는 오하이오주립대에 가서 한국인 2세들과 유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준비기도 끝에 함께 캠퍼스를 답사하고 학생들도 만나고 하던 중 갑자기 그 목사님은 LA에 있는 병원으로 가시게 되었고 우리에게 너무 미안하다며 당신이 평소 알던 분들을 선교 후원자로 소개해 주셨습니다.

캠퍼스전도 시작

부활절부터 일주일에 2, 3일씩 우리가 사는 데이튼에서 약 90km 떨어져 있는 콜럼부스를 오가며 학생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알고 그들에게 우리를 알리려 하니 시간이 너무 부족하여 8월에는 아예 우리 집을 콜럼부스로 이사하고 세 식구가 밥만 먹으면 캠퍼스로 달려갔습니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그리고 차츰 캠퍼스 오벌 광장에서, 맥도널드와 같은 햄버거 가게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한인들이 모일 만한 한국식품점이나, 축구장, 테니스장 등 운동장까지 찾아가 음료수며, 수박 등을 준비해서 나눠주며 극성맞게 저들과 만나 사귐을 가졌습니다.

예배 처소를 허락 받다

계속 모임의 수가 늘어나 기도하며 예배드릴 교회를 찾던 중 강가의 언덕 위에 아름다운 예배당을 발견하고 헌터(Bill Hunter)라는 담임목사님을 만나 무료로 예배장소를 허락을 받은 것은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일이며, 간증이었습니다. 학생들이기에 주일이면 많은 반찬과 음식을 만들어 나누었습니다. 처음엔 거의 혼자 감당했었는데 나중엔 몇몇 학생들도 음식을 만들어 가져와 함께 나눴습니다. 김치냄새가 나고 한국인들이 모여 이런 저런 시설들을 이용해도 누구나 불평 없이 친절하게 대해주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오하이오 한인학생선교회 (Ohio Campus Ministry)

‘인원수에 절대 연연하지 말고 한 사람만이라도 확실히 변화시키자. 교회를 세움이 아니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 갈 때까지 이들을 섬기는 일에만 힘쓰자.’

이런 마음으로 시작되어서인지 전혀 교회에 가보지 못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들의 고백처럼 한국음식 때문에 나온다며, 예배 후엔 교회 뒷마당에서 담배를 피고 들어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일 때, 신앙을 고백할 때의 기쁨은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소극적인 고백이긴 하지만 오래 갈등하던 어떤 남학생은 “하나님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결혼하면 믿는 아내를 만나도 그녀의 신앙을 인정하고 함께 신앙 갖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고 말해 보람을 얻기도 했답니다.

후임자를 위한 기도

크게 교회가 부흥된 것도 아니고, 세례를 많이 준 것도 없이, 그냥 만나 얘기를 들어주고 집을 열어 함께 먹고, 재워 주기도 하고, 저들이 적응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사랑을 베풀기만 했더니 나중에는 40여 명 넘게 모이는 큰 숫자가 되었습니다. 콜럼부스 주변에서 이젠 ‘OCM’(오하이오 한인학생선교회 줄임말)이라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게 되고 자리를 잡아 갈 즈음에 남편은 공부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젠 우리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며 OCM의 후임목회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오하이오 주립대 교수이셨고 장로로 섬기다가 늦게 목회를 시작하시어 미국 교회를 섬기고 있는 이근섭 목사님을 보내주시어, 그것도 캠퍼스에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시무하는 교회가 있어서 기꺼이 후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국인 교회를 섬기시면서 오후엔 한인학생들을 위해 사모님과 함께 사역을 감당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캠퍼스 선교를 마감하며

짧은 2년 반의 오하이오에서의 캠퍼스 사역을 마치고 돌이켜 볼 때 더 적극적으로 전도하지 못한 데 대해 후회도 있지만 정말 주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그렇게 열심히 돕고 전했음에도 듣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보다 동료 목회자들의 무관심과 질시였습니다. 사례를 받는 일도 아닌데 혹시 저 일을 통해 뒤로 큰 물질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고 오해하는 것과, 영주권에 마음을 두고 한다는 둥, 저러다 금방 그만둘 것이라는 둥, 심지어 이단이 아닌가 하는 숱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물질은 먼저 소개했던 목사님께서 이사하며 소개해주신 7-8분의 선교후원자들께서 100불씩 200불씩 2, 3개월을 돕다가 중단하셨고, 두어 분만이 사역 마칠 때까지 기도하며 도와주셨습니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 십일조 드리는 이도 생기고 해서 꼭 한 달씩 지나기에 합당하게 허락하셨고 오히려 1600불 가량의 헌금을 남겨 후임목사님께 인계할 수 있었습니다.

또 감사한 것은 전도의 열매입니다. 전혀 예수를 알지 못했던 자매가 유학생활을 통해 영접하고 귀국해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사는 모습과 여러 형제와 자매들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각처에서 성장된 모습으로 봉사하는 것을 볼 때 바로 이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짧은 동안이지만 캠퍼스를 섬기게 해주셨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지의 캠퍼스를 바라보며

1년 3개월 전에 이곳 평화교회에 부임해 왔습니다. 한 분의 목사님이 개척하여 30여 년을 목회하고 성장시킨 교회입니다. 우리에게는 과분한 목회지이지만 하나님은 이곳에서도 저희를 필요하게 여기셔서 보내신 줄 압니다.

군목과 개척한 교회, 그리고 유학생활 중 얻었던 은혜와 많은 경험들을 통해 새로운 캠퍼스인 이곳 교회에서도 한 영혼씩 구령하려는 사명을 갖고 애써 목회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곳의 성도들을 알고 익숙해 가는 데 전념하여야 하겠기에 지금으로선 외부 캠퍼스선교에 마음을 두지 못하지만 그래도 교회 주변의 대학가를 바라 볼 때 큰 영적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발을 내딛으려 합니다. 새로운 캠퍼스를 향해, 수많은 불신 영혼들을 향해...

*김현덕 사모는 수정동교회(남봉현 목사) 출신으로, 현재 사모들을 위하여 ‘사모이야기’라는 홈페이지(http://myhome.naver.com/samohome)를 운영하고 있다. -활천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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